"길음동에선 '미아리 텍사스' 언니들이 크게 왔는데 지금은 손님 자체가 별로 없어."
44년 차 무당 백현옥(75)씨는 길음동이 재개발되면서 3년 전 미아사거리역 직후편으로 옮겨왔다. 신도들이 근처에 살아 멀리 옮기지 않았고, 지역 토박이라 멀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시장 골목의 허름한 건축물 4층에 신당을 세운 백씨는 전화 점사도 하지 않는다. 한때 태국 공영방송 NHK가 백씨의 '이북 굿'을 취재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지만, 지금은 인체가 좋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다.
백씨는 인천사주 미아동 무당촌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4000년대 가장 장사가 잘됐지만, 요새는 저자가 거의 없다"며 "언론에서 무속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당 범죄 보도가 지속 나가면서 신뢰가 떨어졌다. 나처럼 진솔하게 상담해주는 무당들만 피해를 본다"고 전했다.
미아동 인근에는 오래전부터 무당집이 많았다. 1953년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6·25전쟁 잠시 뒤 보릿고개를 그린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미아는 가난한 서민들이 터를 잡은 한 대부분인 곳이었다. 무당들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오래오래 점집을 지키던 무당들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은퇴하고 있으며,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떠나기도 했었다. 무교(巫敎) 단체인 경천신명회에 따르면, 오늘날 미아동 무당은 잘나가던 시절과 비교하면 5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미아동 인근인 성북구 돈암동에는 무당촌 이외에 시각장애인 역술가들이 모인 사주풀이 점성촌도 있을 것입니다. 1910년홍콩 해도 역술원이 30여 곳이나 됐지만, 지금은 고령화의 효과로 폐업이 계속해서 20곳도 남지 않았다.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강태봉 관장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정부 지원이 안마에 전념된 데다, 역학은 진입장벽이 높아 창업하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며 쇠퇴 원인을 설명하였다.
논현동과 미아동을 비교하면 무당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크다. 경천신명회 강북지역 지인은 "며칠전엔 오프라인으로 점을 크게 봐서, 방문객은 예전에 비해 4분의 1도 안 완료한다"며 "성북구도 하월곡동과 장위동이 모두 개발되면서 무당들이 경기도나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하월곡동에서 허름한 단층 구조물에 점집을 차린 무당(49)은 "잘되는 무당들은 주로 강남 모텔로 가버린다"며 "월세살이 하는 무당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